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윌리엄 4세 (문단 편집) === 왕위 계승 전 === 유럽의 복잡한 정치판에서 확실하게 동맹을 맺을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는 왕가간의 혼인이었다. 그래서 제정된 법률이 '1772년 왕실혼례법(Royal Marriage Act of 1772)'. 요지는 왕의 허락이나 추밀원의 동의 없는 결혼은 무효이며, 혹 그 결혼에서 아이가 태어나도 그 아이에게는 왕위 계승권이 없다는 것이다.[* 이 법이 제정된 데에는 왕실 집안 사정도 크게 작용했는데, 시초는 1771년에 조지 3세의 동생인 [[헨리 프레더릭|컴벌랜드와 스트래선 공작 헨리]]가 멋대로 평민 출신 하원의원의 딸이자 과부인 [[앤 호튼]]과 결혼한 것이었다. 동생이 왕족에 안 어울리는 결혼을 하자 이에 화가 난 조지 3세는 이걸 무효화하려고 왕실혼례법을 추진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조지 3세의 또 다른 동생(헨리에게는 형)인 [[윌리엄 헨리|글로스터와 에든버러 공작 윌리엄]]이 [[로버트 월폴]]의 차남의 사생아이자 어느 백작의 자녀 딸린 과부인 [[마리아 월폴]]과 이미 몇 년 전에 형에게 말하지도 않은 채 비밀리에 결혼했다는 사실까지 조지 3세가 알게 되고 조지 3세는 더욱 노발대발해서 윌리엄의 결혼까지 무효화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법안 성립 전에 적법하게 이루어진 결혼이었기 때문에 소급적용금지의 원칙에 따라 이들의 결혼은 해당 법의 영향권 밖이었고 조지 3세는 뜻한 바를 아무것도 이룰 수 없었다.][* 2015년 3월 26일에 와서야 폐지되었다.] 이 결정에 반발해 윌리엄 4세를 비롯한 [[조지 3세]]의 몇몇 아들들은 허락받고 결혼하느니 차라리 사랑하는 사람과 살겠다고 동거에 들어간다. 이 법이 제정될 때엔 [[조지 3세]]의 후계가 확실하게 정해져있었던 터라 자식이 많았던 왕실에서는 아들들이 그냥 제멋대로 살게 내버려 두었다. 윌리엄 4세, 당시 클래런스 공작 윌리엄이 동거한 사람은 연극배우 '[[https://en.wikipedia.org/wiki/Dorothea_Jordan|도로시 블랜드(Dorothea Bland)', 혹은 '조던 부인(Mrs. Jordan)(1761-1816)]]'이었다.[* 실명이 아닌 예명. 블랜드는 동거는 했어도 평생 동안 결혼은 하지 않았다.] 20년간 동거하면서 자녀를 10명이나 두었다. 후임 군주인 [[빅토리아 여왕]]이 자녀가 매우 많다고 하는데 '''윌리엄 4세가 낳은 자녀 수는 그 빅토리아 여왕보다도 많다.''' 게다가 요절 및 사산된 적자녀 5명까지 합치면 15명으로 아버지인 조지 3세의 자녀 수와 같다. 이쯤되면 윌리엄 4세도 아까웠을 듯. 물론 생물학적으로는 대를 이었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위로 젊은 형들이 둘이나 있어 왕위 계승과는 거리가 있었고, 그래서 위엄 있는 왕족 행세보다는 졸부 귀족급 정도의 그냥 부유한 생활을 영위했던 것으로 보인다. 윌리엄이야 타고나길 [[금수저]]이니 씀씀이가 좋고, 덩달아 이 조던 부인의 씀씀이가 너무나도 헤펐는지 거기에 질린 윌리엄은 1811년 이별을 고한다.[* 거의 결혼한 거나 마찬가지였던 조던 부인은 연극 무대에 더 이상 오르지 않는 조건으로 딸만의 양육권과 1년에 £4000 파운드(2015/12 기준 한화 약 3~4억)의 위자료를 받았지만 다시 무대에 오르락 내리락하다 딸들의 양육권도 빼앗기고 결국 쓸쓸하게 영국도 [[아일랜드]]도 아닌 타지인 [[프랑스]]에서 1816년 사망했다.] 거기까지라면 윌리엄 왕자나 그 사생아들이나 그냥 영국의 한 귀족 가문으로 그냥 평범하게 남았을 텐데, 갑자기 영국 왕위 승계가 삐그덕거리기 시작한다. 첫째 형 [[조지 4세]]의 결혼은 외동딸 '[[샬럿 어거스타]] 공주(Princess Charlotte Augusta of Wales 1796-1817)'가 태어나고 아작이 나서 그 이후로는 대놓고 정부를 들여놓고 살았다. 그의 후계자였던 [[샬럿 어거스타|샬럿 공주]]는 당시 살아있었던 할아버지 조지 3세, 아버지 조지 4세를 이어 계승 순위 2위로 영국 국왕 승계 법률상 훗날 여왕의 즉위가 확실했었다. 유아 사망률이 높았던 18세기 [[샬럿 어거스타|샬럿 공주]]는 건강히 잘 자랐고 또 영특해서 영국 왕실과 대중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1816년 [[샬럿 어거스타|샬럿]]은 훗날 벨기에의 왕위에 오르는 [[레오폴드 1세]]와 결혼했는데,[* 야망이 넘치다 못해 온 몸에 도배를 한 것으로 유명했던 레오폴드 1세 때문에 여론은 이 결혼을 비관적으로 봤지만 남겨진 기록으로 보아 행복했던 결혼으로 보인다.] 결혼 첫 해에 [[임신]]을 했다가 [[유산(의학)|유산]]하고 그 다음 해에 재차 임신해서[* 이 임신은 당시 영국 증시를 들썩이게 할 만큼 엄청난 관심을 받았다.] 이번에는 [[만삭]]은 채웠지만 [[난산]] 끝에 사내아이는 사산, 하루를 못 넘기고 [[임신중독증]]으로 사망했다. 유력했던 후계자가 사망하고 앞서 설명했듯이 조지 4세의 정식 결혼이 파탄났던 관계로 더 이상의 후계자를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불똥은 나머지 조지 3세의 왕위 계승권에 가깝고 아직 '''정식 결혼'''을 하지 않은 아들들에게 튀었다. 말 그대로 1817년판 정자왕 선발대회. * 조지 3세 (1738~1820) 총 15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 중 왕자는 모두 9명이다. * 웨일스 공 조지(조지 4세) (1762~1830) 왕위 확정상속인. 고명딸이자 후계자인 [[샬럿 어거스타|샬럿 공주]]는 1817년에 사망. 정실부인과의 불화로 다시 후계자 생산은 기대 불가능. 결국 적자손 없이 서거했다. * [[프레더릭 어거스터스|요크와 올버니 공작 프레더릭 왕자]] (1763-1827) 조카인 샬럿 공주 사망 후 계승 서열 2위. 팔촌이었던 프로이센의 프리데리케 샤를로테 공주[* 프레더릭의 증조할아버지 [[조지 2세]]와 프리데리케의 증조할머니 [[하노버의 조피 도로테아|조피 도로테아]]가 남매 지간이다.][*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와 첫 번째 아내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의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의 딸. 참고로 프리드리히 빌헬름과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 둘 다 [[프리드리히 대왕]]의 친조카와 외조카다.(즉, [[사촌간 혼인]]) 그러나 부부간의 사이는 나빠서 서로 대놓고 맞바람을 피우다가 끝내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가 궁정 악사와의 사이에서 사생아를 임신하고 야반도주 계획까지 세웠다가, 발각되자 프리드리히 대왕과 프리드리히 빌헬름 모두 빡쳐서 엘리제바트 크리스티네는 낙태당한 뒤 남편에게도 이혼당하고 [[슈체친]]에 감금된다. 그나마 이후 프리드리히 대왕의 기분이 풀어지면서 처우는 상당히 개선되었고, 이혼 이후에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와의 사이도 완화되어 여러 편의를 봐줘서 슈체친에서 유유자적하게 살다가 사망했다.]와 결혼했으나 슬하에 자녀는 없었으며 불화로 별거했다. 형 조지 4세의 재위 당시에는 적자녀가 없는 형의 뒤를 이어 계승 순위 1위가 되었으나 이미 나이가 너무 많은데다, 재혼도 하지 않았고 적자손 없이 조지 4세보다 먼저 사망했고 딱히 정부를 두었다는 기록도 없다. * 클래런스와 세인트앤드루스 공작 윌리엄 왕자 (윌리엄 4세) (1765~1837) 샬럿 공주 사망 후 계승 서열 3위. 큰형이 즉위하며 계승 서열 2위가 되었으며 바로 위 형이 적자 없이 사망하면서 계승 서열 1위가 되었고 큰형이 사망하자 왕위를 승계했다. * [[에드워드 어거스터스|켄트와 스트래선 공작 에드워드]] 왕자 (1767~1820) 샬럿 공주 사망 후 계승 서열 4위. 독일 출신 [[마리 루이제 빅토리아|작센코부르크잘펠트의 공녀 빅토리아]](1786-1861)와 1818년에 결혼. 빅토리아 공녀는 두 번째 결혼이었고, 에드워드 왕자는 이미 50살이 넘었었다. 속이 뻔히 보이는 정략결혼이었는데 딸만 하나를 낳은 후 1년도 안 되어 왕자 본인이 폐렴으로 사망하여 왕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이 [[빅토리아 여왕|외동딸]]이 다음 왕이 된다. 그리고 [[작센코부르크고타 왕조]]로 왕조가 교체된다. *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1세|컴벌랜드와 테비엇데일 공작 어니스트 왕자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1세)]] (1771~1851) 샬럿 공주 사망 후 계승 서열 5위. 독일 출신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프레데리케 공녀(1778~1841)와 1813년에 결혼하여 딸 프레데리카와 아들 조지를 낳았다. 프레데리케 공녀는 세 번째 결혼이었다. 형들의 나이를 고려할 때 왕위를 노려볼 만했으나, 바로 위의 형 에드워드가 죽기 전에 늦둥이 딸을 보는 바람에 밀려났다. 대신 셋째 형의 뒤를 이어 [[하노버 왕국]]의 왕위를 계승했다. 형제들 중 가장 늦게 사망했고, 사후 왕위는 아들 [[게오르크 5세|조지/게오르크]]가 계승했다. * 서식스 공작 오거스터스 프레더릭 왕자 (1773~1843) * [[아돌푸스 프레드릭|케임브리지 공작 아돌푸스]] 왕자 (1774~1850) 1816년부터 1837년까지 하노버 왕국의 부왕으로서 아버지와 두 형을 대신하여 하노버를 통치했다. [[샬럿 어거스타|샬럿 공주]]가 사망한 후 육촌인 헤센-카셀의 아우구스타와 1818년에 결혼해 1남 2녀를 보았으나 왕위는 [[빅토리아 여왕|넷째 형의 딸]]에게 넘어가고, 하노버 왕국은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1세|다섯째 형]]과 [[게오르크 5세|그의 아들]]에게 넘어갔다. 참고로 이 당시 영국의 왕위 계승 법칙으로는 왕 또는 한 계승권자에게 자녀가 있으면 그 자녀가 그 왕 또는 계승권자의 다음 순위를 차지하며, 부 또는 모가 같은 친형제 자매는[* 같은 왕 또는 계승권자를 부모 중 하나로 둔 이복 형제 자매나 이부 형제 자매일 경우 친형제 자매에 준해서 본다.] 같은 성별이면 태어난 순으로 우선권을 갖고, 성별이 다르면 남성이 우선권을 가졌다. 때문에, 조지 3세에게 딸들이 있긴 했지만 그들은 몇번째 자녀냐에 상관없이 이 일곱 왕자와 그들의 자손들보다 계승서열이 밀렸다.[* 지금은 2010년대에 법칙이 바뀌어 친형제 자매는 성별에 상관없이 태어난 순으로 우선권을 갖는다. 법칙이 바뀌기 전에 태어난 사람들에게는 구법이 적용되는데, 직계와 직계에 가까운 왕족들 기준으로 대략 윌리엄 왕세자의 자녀와 조카 항렬부터 개정된 법칙이 적용되고 있다.] 조던 부인과 이별 후 혼자 지내다[* 이때도 데리고 다니던 여인들이 있어서 지금도 윌리엄 4세의 후손임을 내세우는 사람들도 있다.] 점점 부담이 되어가는 위자료에, 그렇다고 국회에서 받는 품위유지비만으로는 더 이상 씀씀이 감당이 불가능했던지 국회에서 빚을 퉁치는 조건으로 추밀원이 추천한 [[작센마이닝겐의 아델하이트]]와 1818년 결혼한다. 27살이나 차이가 나는 26살 신부에게 미안했는지 53세의 새신랑은 이후 외도를 하지도 않았고 씀씀이도 줄여 이후 만년적자를 면하게 된다. 아델라이드 왕비는 검소한 생활로 국민들에게 사랑받았지만 자식 복이 없어 다섯 아이를 모두 잃었다. 첫째 샬럿 공주는 [[1819년]] 3월 27일에 태어났지만 몇 시간 후에 죽었고, 둘째는 1819년 9월 5일 [[사산]]하였다. 셋째 엘리자베스 조지아나 아델라이드 공주는 [[1820년]] [[12월 10일]]에 태어나 2개월 22일 만에 죽었다. 넷째와 다섯째는 쌍둥이 아들이었는데 1822년 4월 8일에 출생 당시 모두 사산하였다. 그래도 윌리엄 4세가 즉위하고 아이를 가질 연령이 지나도 임신 소문이 끊이지 않을 정도로 내외로 보기에 행복한 결혼을 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여러 번의 유산으로 심기가 불편했던 윌리엄 4세는 사석에서 '[[개소문|망할 것들]]'이라며 쌍욕을 했다고.] 다른 형제들과 다르게 아버지로서는 상당히 살가웠는지, 아버지 조지 3세가 붕어하고 형이 조지 4세로 즉위하면서 왕위 계승이 확실해지자 조던 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사생아들을 위해 새로 귀족 가문을 하나 만들어주었다. 그게 '[[https://en.wikipedia.org/wiki/Category%3AFitzClarence_family|피츠클래런스(FitzClarence) 백작 가문]]'이다.[* 윌리엄 4세의 사생아들은 모두 피츠클래런스를 성씨로 달았다. '클래런스의 아들들'이란 뜻으로 윌리엄 4세 즉위 전 작위이던 [[https://en.wikipedia.org/wiki/Duke_of_Clarence_and_St_Andrews|클래런스 공작(Duke of Clarence)]]에서 따왔다고 한다. 서장자(庶長子) 조지는 1831년 윌리엄 4세로부터 [[https://en.wikipedia.org/wiki/Earl_of_Munster|먼스터 백작]] 작위를 받았지만, 7대 백작 앤서니 피츠클래런스가 사망한 2000년 12월 30일에 후계자 없이 단절되고 만다.] 아이가 없었던 아델라이드 왕비 또한 어머니가 없던 윌리엄 4세의 어린 사생아들을 잘 돌봐주었다고 한다. 결혼하기 전까지 확실하게 즐겼고, 군인으로 [[미국 독립 전쟁]]에도 복무했고, 결혼 후에는 부인에게 충실했으며 결혼 전 동거녀와의 사생아들도 확실하게 챙긴 걸 보면, 15명이나 되는 형제들 중 과연 백미라고 해도 되겠다. 그게 아니었다면 영국 총리를 지냈던 [[데이비드 캐머런]]이 윌리엄 4세의 후손을 자처할까?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